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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방콕 수쿰빗 에까마이 한마음선원을 여신 대행스님 구도기 입니다

작성자: 선우마을, 날짜 : , 업데이트 : hit : 3053, scrab : 0 , recommended : 1

 

*이글은 방콕 에까마이 한마음선원(禪院)을 여신 대행스님(1927년~2012년) 구도기(求道記) 입니다.

물론 한마음선원 본원(本院)은 한국에 있습니다.

(선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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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없는 손으로 함 없는 함을 한다!


대행 스님 구도기 4 - 한암 큰스님

 

대행이 방한암 스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열 네 살 때의 일이었다.

당시 대행의 외삼촌은 한암 스님이 주석해 계시던 오대산 상원사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었다.

대행은 열 네 살 되던 해에 어머님을 따라 외삼촌 댁에서 몇 달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때 마침 상원사에서는 재가 있었고

대행은 외삼촌, 엄마와 함께 상원사에 올라가 한암 스님을 대면하게 되었다.

 

한암 스님은 당시 예순 네 살 나신 노승이었다.

대행은 한암 스님에게서

평생을 선미 속에서 살아오신 고승의 맑은 연꽃과도 같은 마음의 향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한암 스님은 속가의 신자들과 합석 하시는 일이 많았다.


당시 조계종의 초대 종정이셨던 고승으로서 스님의 인품은

참으로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인자하셨고 자연스러운 데가 있었다.

대행은 물론 한암 스님이 얼마나 높은 수행승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다.

 

대행은 다만 가끔씩 흑석동 산 위에 있는 절에 올라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 드리시는 어머님을 보고

부처님은 저렇게 경배되어야 하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 선의 중흥조라고 일컬어지는 경허 대선사의 가장 뛰어난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서슬퍼런 조선총독부 미나미 총독의 초청을 깨끗이 거절할 만큼 의연한 분이었고,

오대산에 들어오신 이후 26년 동안 한 번도 동구밖에 나가보신 일이 없이 산사를 지켰으며,

일본 조동종의 명승이요 경성제대 교수이던 사또오가 '세계에 둘도 없는 분'이라고 극찬했던 대선승으로서

 

당시의 불교계를 대표하다시피하던 한암 선사와 대행의 만남은 그렇게 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대행은 외삼촌 댁에 머무는 동안 시간이 나는 대로 상원사로 한암 스님을 뵈러 올라가곤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가르침이려니와

웬지 모르게 한암 스님의 인품이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대행은 서투르나마 한암 스님을 위해 승복을 지어드렸고, 공양을 올렸으며,

또 그럴 때마다 스님으로부터 삶에 대해서, 불법에 대해서 깊고 고마운 말씀을 듣곤 하였다.


스님의 말씀에는 어렵고 딱한 형편에서도 꿋꿋하게 자기의 갈 길을 가고 있는

어린 소녀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이 듬뿍 실려 있었던 것이어서

소녀 대행은 가끔씩 뭉클한 감동을 받곤 하였다.

 

물론 어린 대행은 부처님의 교설도 수행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한암 스님 문하에는 수행승들이 많았다. 소녀는 궁금했다.

저들은 도대체 노스님에게서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도대체 가사, 장삼을 입고 머리를 깎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행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안다면 나도 알테지만 네가 모른다면 나도 모른단다. 그것이 불법이다."

언젠가 스님은 대행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었다.

당시의 대행에게는 그 말씀의 깊은 의미가 얼른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해할 수 없는 말 속에 깊은 뜻이 실려 있음을 대행은

사량으로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그것은 화두가 되었다.

 

스님은 또 말씀하시곤 했다.

"손 없는 손으로 함 없는 함을 할 수 있어야 대장부라고 할 수 있느니라."

손 없는 손으로 함 없는 함을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

대행은 그것도 얼른 납득할 수 없었다.

당시에 대행은 스스로에게 묻고 물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렀고, 운명이 그녀를 부산으로 이끌었을 때까지도 대행에게는

한암 노스님이 그녀에게 던졌던 몇몇가지 말씀들이 화두 아닌 화두가 되어 맴돌고 있었다.


그렇지! 바로 그거구나. 대행은 문득 깨달았다. 바로 그것이다.

내가 한암 스님이요, 한암 스님이 또한 나인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저 영원한 그것, 저 무한한 그것이 아니겠는가!

대행은 순간 불이不二의 깊은 뜻을 알고

마음으로부터의 답답함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시원 통쾌함을 느끼면서 쾌재를 불렀다.


그렇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나는 내 갈 길을 찾은 것이다.

육신의 손으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저 무량광의 세계로부터

사랑을,자비를,눈물을,기쁨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을 얻어야만 한다.

 

대행도 이제 스무 살의 어른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상원사로 한암 노스님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낙원 식당을 포항 아주머니 내외분한테 인계했다.

그렇게 하여 대행은 부산 생활 1년만에 다시 빈손이 되어 그곳을 떠났다.


오대산으로 떠나기 전, 우선 상경을 한 대행은 얼마 동안 집에 머물렀다.

그동안의 경과를 묻는 가족들에게 대행은 몇 마디 간단한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집을 떠났다.

존재의 뼈아픔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꼈던 그녀,

그녀는 이제 더 큰 가족, 더 넓은 의미에서의 가족들을 위해 살아야 했다.


이미 그녀는 세속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빠'의 부름에 따랐다.


발걸음은 동으로 동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녀가 오대산 상원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근 한 달이 지난 뒤였다.

대행은 한암 큰스님께 문안을 드리고 자비로운 스님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큰스님은 여전했다.

맑고 부드러우면서도 투철한 스님의 안광은 여전히 깊은 선향을 내뿜고 있었다.

열네살 적에는 짐작하지도 못했던 스님의 지밀한 선의 세계, 마음의 세계가

이제는 점점 뚜렷하게 대행에게 느껴져 왔다.

 

스님 앞에 앉은 대행의 몰골은 참담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반걸식, 반노숙으로 옷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온몸에는 긁히고 찢어져 피멍이 맺힌 데가 많았다.

이런 몸으로 큰스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 이상스러울 지경이었다.


바로 그랬다.

한암 스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시는 분은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승려든 속인이든 가리지를 않으셨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진심으로 응대하셨던 것이다.

아마 걸인과 다름없이 보였던 대행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한암 스님을 직접 친견할 수 있게 된 것은

스님의 그런 성품을 알고 있는 시자들이 대행을 가로막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대행에게는 더욱더 한암 큰스님이 친근하게 느껴진 것인지도 몰랐다.


"쯧쯧쯧..."

초라한 몰골의 대행을 바라보시며 스님은 나직하게 탄식을 하셨다.

대행은 갑자기 가슴 속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딸아이에게 하듯이 던지시는

그 "쯧쯧"하는 탄식이 굳건하게 다져지고 있던 대행의 마음을 와르르 무너뜨려 버렸던 것이다.


대행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암 스님께서는 옆에서 시봉을 하고 있던 탄허 상좌에게 삭도를 가져오도록 분부하였다.

탄허 상좌는 곧 접시 위에 삭도를 받들고 다시 들어왔다.


서로들 아무 말이 없었다.

노스님께서는 직접 삭도를 들어서 삭발을 해주셨다.

이윽고 삭발이 끝나자 대행은 이제는 속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행자로서 큰스님께 삼배를 올렸다.


그때 큰스님께서 문득 물어 오셨다.

"지금 누가 예배를 했느냐?"

거침 없는 노(盧)행자의 답변.

"큰스님과 제가 서로 둘이 아니기에 이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야무진 대답에 한암 스님께서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행은 이제 예비 승려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상원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암자로 보내어졌다.

상원사는 비구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었으므로 비구니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곳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대행은 거기에서 불제자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면서 본격적인 내면 탐구에 매진했다.

그러나 틀에 박힌 사찰 불교가 그녀의 뜨거운 마음을 흡족하게 적셔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관념과 의론만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외형적인 교수 방법이 그녀에게는 불만스럽기 그지 없었다.

대행은 이미 마음의 본체를 보아 버린 때문이었다.


대행은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수도자였다.

그녀는 결코 안일하게

규정된 시간 동안 규정된 형식을 따라서 수행을 한다는 것 속에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행은 이미 수행 삼매 속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선배들은 그렇지가 못했고, 그 때문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참으로 마음의 깊이를 맛본 대행에게,

아직 마음이라는 것의 발자취도 찾지 못한 선배들이 자신의 교학과 의론을 강요할 때,

대행은 이미 그 체득자로서의 떳떳함으로 의연하게 응대하였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진리에 대해서만은 결코 양보할 수가 없었다.


대행은 더 이상 형식적인 절간생활이 자신에게 진리를 찾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미련없이 암자를 떠나버렸다.

그리고는 정처 없는 만행과 산행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산승의 생활을 하기 그 얼마였던가.

세상에는 그녀처럼 온몸으로 부딪치며 길(도)을 찾는 이는 적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행에게 한암스님의 모습만이 점점 크고 둥뚜렷하게 비쳐올 뿐이었다.


아아, 큰스님...

대행은 뜨겁게 큰스님을 불렀다. 그것은 그분이 걸어가신 그 길이 얼마나 멀고,

또 진리 그 자체에서 한 치의 빈틈도 없었던가를 점점 알게 되면서 토해내는 찬탄이었다.


"큰스님, 문안드립니다."

대행은 큰스님에 대한 그리움이 뭉게뭉게 솟을 때면 단걸음에 상원사로 달려가곤 했다.

아무 때든 가리지 않고 그녀는 달려갔다.

"오, 네가 왔구나..."


한암 스님은 여전하셨다. 그러나 이제 전보다 대행은 태도에 있어서 더욱더 공손하였고,

마음에 있어서 이를 바 없는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대행은 큰스님과의 선문답을 통해서 자신의 경과를 확인하였다.

오직 아는 이만이 아는 이 세계를 더불어 이야기하고 또 점검할 수 있는 사람은,

대행에게는 한암 큰스님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가 존경해 마지 않는 한암 스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내키지 않을 때 그녀는 날카롭게 응대하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면 한암 스님은 대견스러운 듯 대행을 찬탄하실 때가 많았다.

 

네가 쑥쑥 커가고 있구나...

한암 스님은 그런 마음으로 대행의 기개를 받아들이시는 듯하였다.

그러고 나면 대행은 또다시 자기의 갈 길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만행.

강원도 일대의 거의 모든 산과 암자에 그녀의 발길이 닿아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대행이 한암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1950년이었다.

그해 3월, 대행은 한암 큰스님의 생신을 기억하고 큰스님께 문안을 드리기 위해 상원사로 갔다.

음력 3월 23일이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는데 큰스님은 상좌 탄허와 함께 반갑게 노행자를 맞아 주셨다.


그날은 마침 한암 스님의 생신이면서, 한암 스님으로서는 마지막 직제자 두 사람을 배출한 날이기도 했다.

낮에 두 사람의 새로운 구도자에게 스님께서는 비구계를 주셨던 것이다.

대행은 한암 스님의 방에서 스님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물론 독대라 해도 한암 스님을 늘 곁에서 모시는 탄허 상좌는 그 자리에 없을 수가 없었다.

탄허 스님은 대행 스님이 한암 스님과 인연을 맺은 이래로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대행 스님과 다시 상면하게 되었을 때

탄허 스님은 얼마나 기쁘게 사제의 성도成道를 기뻐해 주셨던지!


그리고 그 뒤로 대행 스님과 탄허 스님 두 분은 서로 법우요, 선지식으로서의 교분을 계속하게 되었다.


"내가 오늘 마지막 아이들을 내보냈어."

한암 노스님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에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 짙게 실려서 대행의 가슴에 와 닿았다.

"너도 이제 정식으로 사미니계를 받아야지. 이젠 다시 기회가 없을라. 이리 오렴, 우리 여장부님!"


거기서 대행은 한암 큰스님에 의해서 정식으로 계를 받고 여승이 되었다.

한암 스님은 형식적으로 계를 주기보다는 곧바로 마음의 본분을 묻는 선문답을 던져왔다.

무려 4년 만에 다시금 한암 스님에 의해 정성스러운 삭발이 끝나고 나자

큰스님의 비수처럼 날카로운 질문이 떨어졌다.


"지금 누가 계를 받았느냐?"

촌각의 여유도 주지 않는 노행자의 대답.

"스님께서 계 주신 사이가 없고, 제가 계 받은 사이가 없습니다.

다만 한 마리 학이 청산에 훨훨 날 뿐입니다."

다시 큰스님.

"네가 **야 너를 볼 것이다."

"**야 할 나는 어디 있으며 죽여야 할 나는 어디 있습니까?"

문득 소리를 높여서 큰스님.

"네 마음이 어디 있느냐?"

역시 거침없는 노행자의 응수.

"목마르실 텐데 맑은 물 한잔 드십시오."


다시 큰스님의 질문.

"내가 지남철이요, 네가 못이라면 어떻게 되겠느냐?"

노행자.

"못도 지남철이 됩니다."

그에 이르러서 한암 스님께서는 감탄하시고 말았다.

"네가 정녕 너로구나. 가거라. 네 법명은 청각淸覺이니라."


노행자는 큰스님께 정성스러운 삼배를 올렸다.

 

아마도 한암 스님께서는 자신의 현생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셨던 것 같았다.

그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이 아니던가. 강토는 갈갈이 찢겨졌고

모든 사람들의 삶은 뿌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서 휩쓸렸다.

그 와중에도 한암 스님께서는 결코 절을 떠나지 않다가 1

951년 3월에 단정히 앉으신 채로 태연하게 입적하셨다.

그때 세수는 75였고 법랍은 54년이었다.

그래서 대행은 한암 큰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마지막 승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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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스님과 문답] 신들림 / 종교의 근본| 불교(佛敎) 
2017.02.06. 18:47
 

[대행스님과 문답]- 신들림 / 종교의 근본

 

질문자6(남) :

저는 청년회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몸에 신(神)이 들린 사람들이나 신기(神氣)가 있는 사람들이 백만 명이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상당히 평화롭지 못하고 분란이 무척 많습니다.

   

신기(神氣)가 있거나 신들린 사람들이 왜 그런가 하고 곰곰이 몇 년 동안 생각을 해봤었는데, 물론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그런 영향이, 머리가 좋을수록 무척 많더군요. 그래서 우리 청년들 중에서도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암자 같은 데, 전국 곳곳의 계룡산이라든지 그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습니다. 제가 직접 많이 듣고 또 현실로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신기가 있거나 신들린 사람들이 가정이 평화롭지 못한데 다 업보 때문인지...

    

 

큰스님 : 이제 내가 말할까요?

질문자6(남) : 가족의, 가정의 인연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큰스님 :

글쎄, 그러니까 얘길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렇게 되는 데는 세 가지 경우가 있어요.

첫째는, 부모가 모시던 영령(英靈)이나 선대에서 모시던 영령이 딴 데로 뜨질 못하고, 그냥 자손들한테 연결이 되는 경우가 있고,

 

두 번째는, 오다가다 차 사고나 또는 물에 빠져 그 영령이 죽은 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어 생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보이지도 그림자 같은 영령이 아무대로나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 자리에 딴 사람을 하나 넣고야 자기가 벗어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셋째는, 내 몸뚱이 속의 의식들, 생명, 모습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내 안에 전부 입력이 돼 있는데, 이러한 업식들이 ‘나는 아무개다, 나는 아무개다.’ 하고 그 안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에 속아서 그냥 영이 들린 줄 알고, 떼어낸답시고 밖으로 헤매는 거죠. 내 마음이 그러니 그 의식들이 다 ** 영계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 하나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는 거죠. 내 몸뚱이 속에서 부글대는 의식들, 생명, 모습 중 이게 동요할 때는 이거에 영향을 받아서 움직이고, 또 저게 동요할 때는 거기에 동요를 받아서 움직이며, 막 부수라고 하는 의식이 나오면 그대로 막 부수고, 이렇게 내 몸이 그냥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위에서 볼 때는 미쳤다고 할 수밖에요.

  

영령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고치려면 천도(遷度)를 해드리면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과거의 조상들을 다른 데로 보낸다고 해서 천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물방울이 세 방울이 있다면 한 컵에 다 집어넣으면 한 컵의 물이 되듯이, 그렇게 다 집어넣으면서 천도를 한번 해 드리면 되는 겁니다. 세 번을 하든지, 두 번을 하든지, 한 번을 하든지 그렇게 하면서 이게 한 컵의 물이 돼야 괜찮아지죠.

  

옛날에 이런 적이 있었어요. 부인이 어린애 둘 낳고 죽었는데 그 후 새 부인이 들어오기만 하면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남자가 도저히 새 부인을 얻어 살 수가 없었거든요. 그 얘기를 듣고는, 애들 엄마의 영혼을 자꾸 떼어 놓으려고만 하지 말고 지금 새로 들어오는 부인과 하나가 되게 해주면은 얼마나 잘 살겠는가라고 생각을 했죠. 이렇게 생각을 좀 융통성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게 아량과 지혜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부모 밑에 있는 자손들은 고생을 덜게 되는 거고, 지혜롭지 못한 부모 밑에 있는 자손들은 더 힘들어 지는 겁니다. 죽은 엄마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애지중지하게 자식 낳아 기르면서 살다가 그저 좀 살만하니까 어린 자식을 놔두고 죽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들어온 그 여자의 몸을 빌려서라도 그냥 같이 살아라 한 거죠. 이렇게 해주니까 모두들 잘살고 잘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거든요.

  

예를 들어, 판사가 죄 지은 사람들에게 판결을 내릴 때에 여러 가지를 고려하는 것처럼, 영령들을 위해 마음을 낼 때도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불쌍한 것도 침착하게 한번 생각해 볼 점이 있고, 또 가난한 사람도 생각할 점이 있고 부자도 생각해 볼 점이 있고, 사람 마음의 질이 어떤가를 살펴서 다 참작할 수 있어야 되는 거거든요.

 

특히, 스님네들은 진실하게 모든 것을 근본에 맡겨서 하되, 거기서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천차만별로 화하면서 어떻게 여러분을 이끌어갈 수 있나, 길잡이가 될 수 있나를 생각하며 생활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활해야 하는 것이 스님이에요. 허허허. 물론 거기에도 스님들의 그릇이 천차만별이죠.

  

또 어떨 때는, 천도시켜야 하는 영계들이 그냥 악하고 모자라서 자비를 베풀 마음의 여지가 없는 예도 있습니다. 이런 영계들은 살아생전에 물질만 알고 살던 영계들이기 때문에, 종이를 돈 모양으로 오려서 갖다 놓으면서 때로는 물질로서 여러 가지 많을 걸로 보여 주면서 하는 이치도 있습니다. 오다가다 죽은 영계들이 그 죽은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고 친한 친구가 **서 오는 문제도 있습니다. 경우는 여러 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영령이 들게 되는 원인은 바깥으로 믿고 찾기 때문입니다.

머리 굴리기를 좋아해 ‘요걸 요거 아, 요거 위에는 뭐지?’ 하면서 이렇게 밖으로 찾고 돌아다니게 되면, 바깥에서 ‘아, 이 집 주인이 없구나! 내가 들어가 살아야겠다.‘ 하는 거죠.

  

임제스님이 말씀하시길, 중심을 잡지 않고, 자기 주인공을 바깥으로 믿고 찾는 사람들은 바깥의 온갖 보이지 않는 곳의 영계라든가, 세균 그런 것들이 빈집이라 여기고 막 들어와서 살게 되니까 그런 거거든요.

 

그게 그렇게 해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바깥으로 찾지 말라고 내가 항시 타이르죠? 그러니까 혹여 뭔가 이상한 거 모셔놓고 떠받들던 게 있다면 지금 다 없애십시오. 자손들한테 어떤 악영향도 미치지 않게 하려고 그러는 겁니다.

  

안에서 의식이 일어나서 발생되는 문제는,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즉 말하자면 업보로 인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차례로 나오는 거를 내 근본 자리에 되 입력하면 그것도 없어진다 이겁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달려 있으니 이 공부가 아주 필요합니다.

 

그런데 영계가 들린 사람들이나 안에서 업보로 인해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면, 본인이 觀하게끔 영계나 업식이 놔두질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라. 거기 가지도 마라.’이럽니다. 그리고 ‘방에서 나가지 마라.’ 하기도 하고 ‘먹지 마라.’ 이러기도 하고, 뭐 별짓 다 합니다. 그렇게 자꾸 가로막는 거죠.

 

그렇게 하라는 대로 따라서 움직이게 되니 도저히 정상적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집안에서 감당이 안 되는 상태가 되어 가족들이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을 병원에 입원 시키고는 가족들이 침착하게 관해 주라고 하는 겁니다.

  

질문자6(남) :

지금 시간이 다 됐다고 하니까 한 가지만 짧게, 꼭 긴요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비슷한 얘기 같습니다만, 아까 제가 마지막에 질문한 것처럼, 그 사람 부모가 신이 들리면 밑에 있는 자손들이 같이 고통을 겪는데, 그러면 자손들이 부모로 인해 받는 고통도 자기가 지은 업보 때문인지요? 그 자손들이 지은 업보 때문인지요?

  

큰스님 :

그렇지. 염주가 이렇게 있으면 한 염주 줄에 염주 알이 다 꿰어져 있잖아요. 자,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봐요! 깡통은 깡통끼리 모이죠? 미술가는 미술가대로 모이고 말입니다. 한 식구도 그렇게 같은 차원이나 업적에 따라 모였거든요. 그렇게 모였으니까 같이 겪는 겁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을 갖고 차원의 높낮이를 얘기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걸 제대로 알고, 속지 말고 일체는 내 근본, 한 군데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한군데에다 다 맡기고 , 그냥 믿고 거기서 그냥 다 해결하게끔 한다면, 해결하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질 못해! 그걸 몰라요! 말을 열 마디 백 마디 해줘도 그게 납득이 되질 않나 봐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글쎄. 내가 당신 대신 똥을 눠 줄 수 있고 먹어줄 수 있고 ** 줄 수 있다면 내가 대신해주겠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단 말이죠.

예를 들어서 최고 법원에서 5년이든 10년이든 판결 내린 것을 제 삼자가 대통령이라 한들 무죄로 만들 수 있나요? 당신 근본 마음이 최고 판사예요.


질문자6(남) :

그 밑에서 자식들이 받는 것도 자식들이 그만큼 졌기 때문에 받는 거니까, 그.....

 

큰스님 :

똑같이 진 거죠. 부모나 자식이나 똑같이 업보를 지고 똑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거거든요,

그게. 그러니까 누구 탓을 할 수가 없지요.

부모가 자식 탓 할 수도 없고 자식이 부모 탓 할 수도 없어요!

 

질문자6(남) : 예. 감사합니다.

 

큰스님 :

자신들만이 부모가 하던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업보가 없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그 가족 중에 한사람만이라도 이 마음공부를 하면 업보가 녹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들 하는 거보다 배로, 자기가 적극적으로 그냥 들어가야 합니다. 가족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까지도 합해서 그냥 다 집어넣고 들어가야겠죠. 그러든지 가족 모두가 똑같이 열심히 하면 어쩌면 무산돼 버릴 수가 있고요!

  

하여튼, 여러분! 이렇게 도반으로서 같이 공부하게 돼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넓고 복잡한 세계 속에서, 복잡한 국내 속에서, 복잡한 가정 속에서, 복잡한 이 몸속에서도 공부를 할 양으로 애를 쓰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처 다 됐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질문자7(여) :

저는 평상시에 불교나 천주교나 절대자를 믿는 마음으로써 우리들을 항상 진실한 길로 인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해서 하나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오늘도 이웃사촌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서양 사람은 서양음식을 먹고 한국 사람은 한국 음식을 먹듯이, 불교가 맞는 사람은 불교를 믿고, 저같이 천주교가 맞는 사람은 천주교를 믿습니다.

 

어떤 진리를 믿든지 간에 우리가 올바른 사람이 되고, 서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마음으로 참석했는데 스님은 정말 불교를 믿어야지만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고 저희 같이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구원의 길을 갈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대중웃음) 저는 그게 굉장히 궁금합니다.

  

큰스님 :

잘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외국에 갔을 때 티베트불교, 알라신교, 뭐 카톨릭교, 기독교를 믿는 세계의 여러 종교인들과 만나 토론을 해볼 여러 기회가 있었어요.

 

우선 불교(佛敎)라는 단어가 그냥 주어진 게 아니에요.

일체, 하다 못 해 풀 한 포기의 생명까지도 전체 생명은 불(佛)이에요 불!

그리고 말로 통하고, 뜻으로 통하고, 마음으로 통하고, 그 외 여러 가지로 통해서 서로 만나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고 하는 것이 교(敎)예요.

 

그러기 때문에 불교라는 단어는 방편 아닌 방편으로의 이름이지만 그대로 진리예요. 우주 전체가 돌아가는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교란 어느 한 군데 국한 돼 있는 게 아니에요.

 

이와 같이 어느 종교이든지 바로 겉모습은 다르지만, 그 가르침의 요지는 모든 것의 근본은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주처(主處, 자기 내면)에 있는 거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외국에서 기독교니 카톨릭교를 믿는 사람들과 토론을 해봤는데 그게 하나도 틀리지 않더군요.

불교나 기독교나 카톨릭교나 다름없이 선지식은 전부 ‘타의의 사람을 믿으면 마구니 소굴에 드느니라.

너 자신부터 알라.

주처(主處, 주님, 主人空, 뿌리)는 바로 너 몸뚱이 속에서 모든 생명들을 다스리고 나가는 선장이 있는데, 바로 그 자체가 주인이니라.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가 바로 네 주인과 직결이 돼 있으니깐,

그 주인부터 알아야 전 우주의 섭류를 알 수 있느니라.’ 라고 가르치거든요.

  
그런데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아이고! 잘되게 해주십시오.

주님! 하나님! 부처님!’ 하고 밖으로 찾으니까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근본인 너부터 알라고 가르치는 거예요. 

어떤 종교를 믿든지 간에 여러분 자신부터 아셔야 합니다.

 

못났던 잘났던 내가 이 세상에 형성 됐으니까 상대가 있고 종교가 있고 세상도 있는 겁니다.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부터 알아라 이런 거죠. 이게 어리석은지 아닌지는 각자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내 몸속에 생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의 의식과 모습이 있어요. 천차만별로 말입니다. 그리고 아까도 내가 얘기했듯이 그거를 다스리는 주인이 있습니다. 내 몸속에 있는 자생 중생들로 하여금 물질세계, 정신세계와 더불어 중도행을 하게 하는, 들이고 내는 그런 선장이 있다 이겁니다.

 

그것을 주님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라고도 부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걸 바깥에서 찾으니까 제가 자꾸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인데, 만날 바깥으로 찾으니까 말이에요.

  
나는 이 종교 저 종교를 다르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다르게 생각하고 들으면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 속에 주님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 이랬습니다.

예수님의 몸뚱이, 그 고깃덩어리를 믿고 따르라는 게 아니라,

각자 너를, 진짜로 네 주인을 믿어라 이런 뜻이었는데, 내려오는 과정에 뭔가 잘못된 게 있었겠죠.

  

또, 안에서 찾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대장경으로까지도 해놓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바깥으로 찾고 기복으로 믿고 있는 겁니다.

불교도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종교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조선시대에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해산시키며 스님네들을 그냥 놔두지를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스님들이 산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절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 썼던 많은 방편들이 아직까지도 습이 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개선해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니까 모두 다를 바가 없어요.

  

질문자8(남) :

어떤 사람들이 말하길 구원을 절대자, 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는, 주인공이 구원해 준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인과와 업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스님께 질문하는 얘길 들어보면 많은 고통들을 받고 계시는 것 같은데, 그럼 과연 인간의 출생 자체가 축복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제가 알기로는 많은 업적을 쌓은 존재들이 인간으로 선택받아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동물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볼 때는 인간이 동물보다 더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동물들은 욕심 때문에, 필요이상 쌓아두기 위해서 살생하지는 않거든요. 또 제가 알기로는 이생에서의 삶은 전생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주어진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면서도 과거의 업보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 더 많은 해악을 끼치며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소수의, 부를 축적하면서 정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이번 생에 저지른 해악 때문에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받게 될 텐데 이런 윤회는 끝없는 악순환이 되는 것 어닙니까? 그러니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과연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스님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데 스님들은 고행을 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여간 인간의 삶이 끝없는 연속이라는 생각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큰스님 :

우리가 똥 누고 밑 안 씻고 일어나면은 거북하죠? 저분이 지금 똥 누고 밑 씻고 일어나듯이 깨끗하게 정리를 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첫째, 어떤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어느 종교를 믿든지 간에 우리는 자기 뿌리를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주인으로 알고 믿어야 된다는 말이죠.

 

바깥으로, 주여! 하나님이여! 부처님이여!‘ 하며 찾지 말고, 이 모두가 자기 주처(主處, 내면의 뿌리)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자기가 자기로부터 구원을 받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거지 누가 구원을 해 주는 게 아니죠.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자기가 들어서 구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원 받게 하는 겁니다.

 

모든 생명들의 집합소인 이 몸은 시자나 종과 같아서 여러분의 주인인 근본이 그 생명들을 다스리는 거거든요.

그러니 사실, 누가 자기 몸을 구원해주고 말고가 없어요. 자기가 지은대로 구원을 받고 못 받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스님이 더 불쌍한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그러나 그건 다 생각하기에 다른 거죠. 한 시간을 자도 하루를 잤다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불쌍한 게 하나도 없죠. 허허허. 그런데 바깥에서 볼 때는 어휴, 저 사람은 한 시간 밖에 못 잤어, 참 안 됐어.‘ 이러거든요. 이렇게 생각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윤회의 악순환이 그냥 거듭거듭 된다고 그러셨는데, 사실 윤회란 그렇게 불합리한 악순환이 아닙니다. 일부분만을 보고 짐승들이 사람들보다 낫다 라든가, 더 잘 입고 잘사는 사람이 죄를 더 많이 짓는 것 같다는 것도 또한, 추측을 하여 결론지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자기가 한 일들이 이 자동적이 컴퓨터에 잘했으면 잘한 대로 못했으면 못한 대로 다 입력이 돼서 돌아가니까요.

 

제 삼자가 판결을 해 주는 게 아니라, 자기 컴퓨터에 입력이 돼 가지고, 그 입력에 의해서 바로 결과가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잘 살았으면 잘산 대로, 못살았으면 못산 대로의 삶이 주어지겠죠. 만약 거지를 발길로 차고 업신여겼다면 어느 시점에 내가 그 사람한테 빌어야 하는 그런 입장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악과 선과 같은 양면을 다 버리라고 가르치신 겁니다. 사실 선행이라는 것만 보더라도 선행이 선행이랄 게 없거든요. 예를 들어 남을 도와주는 게 선행이라고 하지만 남을 돕게 되면 얻는 게 있고, 얻게 되면 또 주게 되니까요. 그래서 양면을 다 놓으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야 이 물주머니에서 벗어난다 이겁니다.

 

여러분에게 이 공부를 하시라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 공부를 하시라고 내가 강조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분들 스스로가 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고통을 받으면 제가 괴롭거든요.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모든 종자 종류가 차원대로 천차만별로 그냥 이렇게 퍼져요. 아마 우리 지구에만 이렇게 생명들이 퍼지는 게 아니라, 딴 혹성에도 그렇게 퍼지고 있는지도 모르죠. 이렇게 말해야 또 흥미가 나겠죠? 하하하. (대중 웃음)

우리가 살면서 나 하나 알기도 힘이 드는데 샛눈 뜨고 딴 거 볼 사이가 어딨습니까?

 

그런데 나를 보고 나를 믿으면, 거기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나가는 힘을 얻게 되고, 더 나아가 그 힘을 가지고 우주 천하도 굴릴 수 있게끔 발전을 해 나아가야 하는데 샛눈 뜰 새가 있습니까? 모두가 둘이 아닌 이 도리를 알면 한 눈 팔 것도 없고 한 눈 둘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잘하고 잘못하는 거를 눈여겨 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신도들도 중들이 얼마나 잘하나 눈을 뜨고 보는가 하면, 스님네들도 어떤 분들은 신도들을 볼 때 ‘아! 요거는 죄가 있겠구나, 요거는 죄가 없겠구나!’ 하고 눈을 살피거든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무조건입니다. 죄가 크든 작든 간에 그 사람이 죄를 진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이지, 어디 거기에서 더하고 덜함이 있겠습니까? 불성은 크나 작으나 똑같습니다. 부자로 살면서도 아주 측은하고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게요! 아까 말씀하신 거와 같이, 그렇게 사는 것이 또 얼마나 길게 갈까요?

  

또 보시에 대해서 한번 말해 볼까요? 만약 여러분이 10만 원을 가져왔다고 칩시다. 그럼 여러분을 얼마를 가져왔고, 누구에게 줬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나 도한 그 돈을 아무개가 가져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알죠? 그렇게 알고 있는 마음은 바로 어디로 빠져 나가는 게 아니라 근본에 입력이 돼요. 그러니까 누구를 갖다 줬다, 누구를 도와줬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도 또 ‘내가 이런 거를 이렇게 선처를 베풀어서 그 사람이 좋아졌다.’ 하는 이런 생각은 안 합니다. 내가 한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남이 가져온 돈을 아무렇게나 쓴다거나, 자기가 뼛골 들여서 벌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그냥 사치스럽게 살고, 돈을 쌓아두고는 뭐 개인적으로 땅을 산다거나 하면서 부를 축적한다면, 그거는 근본에 다 입력이 되어, 오히려 그 어떤 속인보다도 못한 삶을 살게 되죠.

 

모든 것들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기록되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거짓으로 사는 사람들은 허탕 사는 거죠. 자기가 뭐가 될지도 모르고, 자기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고, 어떤 게 진정인지 어떤 게 진실인지 그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네들은 자유스러운 게 있죠. 설사 여러분들이 그런 수행하는 스님들이 안됐다는 생각에 돈을 주었다 하더라도 스님들은 받은 사이도 없고 쓴 사이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스님들은 받았으되 받았다는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었다 하더라도 줬다는 생각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친척이든 친구이든 아주 급하게 되어 여러분에게 돈 백만 원이든 십만 원이든 꿔달라고 그냥 목을 맬 때가 있다면, 그런 때에는 그냥 돈이 있으면 그냥 줘요. 그 사람이 잘 되면 받고, 만약 잘못되어 못 받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아예 받으려는 생각하지 말고 아주 그냥 주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거를 나중에 받으려고 하고 준다거나, 더욱이 이자에 이자까지 받으려고 했다가 나중에 그 돈 못 받게 되면 의리 끊어지고 화병나서 죽게 돼요. 그리고 세세생생 구르다가 지혜롭지 못한 한생각에 그 영향이 자식들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일체 제불의 마음...

일체 제불의 마음은 내 한마음

일체 제불의 법이 내 한마음의 법이며 생활

일체 제불의 몸은 일체 중생의 몸

일체 제불의 자비와 사랑은 일체 중생의 자비와 사랑

선행하는 것도 악행하는 것도 다 내 한마음에 있습니다.

  

- 대행큰스님 1994. 12. 18. 법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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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와 방한암 스님(위 글의 대행스님의 스승)

 

경허,만공,수월과 함께 근세에 크게 선풍을 이룬 방한암 스님(1876~1951)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이 치열한 즈음 산속의 절이 군사 거점이 된다하여 월정사와 상원사의 소각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이르니 노스님 혼자서 절을 지키고 있었다.

 

불을 놓을 터이니 비키시라 하자 방한암스님이,

“그렇다면 이 법당과 함께 불에 타서 소신(燒身)공양하겠노라.” 라며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의 굳은 의지에 군인들도 감화를 받고 한걸음 물러났지만,

 

 상부의 명령이었기에 불복종할 수는 없어 절의 문짝만 떼어내 불살라 절이 불에 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때에는 스님을 존경하던 조선 총독이 찾아와 전쟁의 승패를

 물었는데 “정의로운 자가 이길 것”이라 의연히 답하기도 하였다.

  

 방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중원(重遠),  스물 둘 되던 해  금강산 유람 중에 출가를 결심하였다.

기암절벽(奇巖絶壁)의 경승과 운치 속에서 강렬한종교적 감흥을 받고 입산한 뒤,

보조국사 수심결 (修心訣)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自性)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티끌처럼 많은 겁을 몸을 태워 기도하는 고행을 하고 팔만대장경을 모조리 독송한다

 하더라도, 이는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이 오히려 수고로움만 더 할 뿐이다.”

 

스물넷 되던 해에는 경북 청암사 수도암에서 우리나라 불교계의 중흥조(中興祖)라고 불리는

 경허스님을 만났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만일 형상이 있는 것이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지라.”하는 경허 스님의 말씀을 듣고 방한암스님은 다시 깨우침을

 얻어,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님이 없었다.

 

쉰 살이 되던 해 봉은사 주지를 지낼 때에는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상춘(常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을 찾았다.

그 뒤 76세의 나이로 입적 할 때 까지  27년 동안 오대산 동구 밖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듯 이 땅의 뛰어난 선사였던 방한암스님이 야마가와 주켄(山川重遠)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 명을 하였던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41년 총독부가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설립을 공식 인가한 뒤 초대 종정으로 취임하였는데,

[산불교] 제 31집에 사진과  함께 그 이름이 대외적으로 공포된 것이다.

27년 동안이나 동구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던 그가  직접 창씨개명을 했다든가 또는 친일성의 글을 직접

발표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비록 그것이  휘하의  인물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 오명은 지울 수 는 없는 것이다. 

 

오대산 중대 사자암에는 방한암스님이 꽃아 놓은 지팡이가 있다.

“이 지팡이가 사는 날  내가 다시 살아  오리라.”

 하였는데, 지금은 그 지팡이에 가지가 돋고 잎이 피어 훌륭한 단풍나무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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