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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압축 효과

작성자: 뽀동이, 날짜 : hit : 1944, scrab : 0 , recommended : 0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를 어른이 돼서 찾아가보면 거리들이 옛날에 생각했던 것보다 좁아 보인다. 또한 옛날에는 그 거리들이 한없이 길게 보였는데, 지금은 몇 걸음 걷지도 않아 그 거리의 끝에 도달하고 만다. 골목길, 정원, 광장, 공원 등 모든 것이 옛날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버린 것 같다. 심지어 교실도 옛날보다 작아 보인다. 옛날에 비해 몸집이 똑같은 선생님들이 그 교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 번이라도 오랜만에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본 사람이라면 위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기억이라는 게 참 묘하다고 느끼게 되리라. 세월의 문제는 곧 기억의 문제다. 네덜란드 심리학자 다우베 드라이스마(Douwe Draaisma)가 쓴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Why Life Speeds Up As You Get Older)』(2001)가 주로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중년이 넘어간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오는 말이 있다. "아니,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 이 물음엔 이미 상식이 된 답이 있다. "시간은 10대엔 시속 10킬로미터, 20대엔 20킬로미터, 30대엔 30킬로미터, 40대엔 40킬로미터, 50대엔 50킬로미터, 60대엔 60킬로미터로 달린다." 그런데 왜 그렇지?

1877년 프랑스의 철학자 폴 자네(Paul Janet, 1823 ~ 1899)는 사람의 인생 중 어떤 기간의 길이에 대한 느낌은 그 사람 인생의 길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10세의 아이는 1년을 인생의 10분의 1로 느끼고, 50세의 사람은 50분의 1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시원한 설명을 제공해주진 않는다.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 ~ 1910)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더 그럴듯하다.

"어렸을 때 사람들은 항상 주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불안감은 생생하고, 기억은 강렬하다. 그때에 대한 우리의 기억 속에는 빠르게 움직이면서 아주 재미있는 여행을 했을 때의 기억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여러 가지 일들이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이런 경험들 중 일부가 자동적인 일상으로 변해 사람들이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되고, 하루 또는 일주일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알맹이 없이 기억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래서 한 해의 기억이 점점 공허해져서 붕괴해버린다."

듣고 보니 그렇다.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경험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억할 만한 것도 사라지고, 시간이라는 열차는 기억이라는 정거장을 경유하지 않은 채 마구 내달릴 게 아닌가 말이다. 이를 가리켜 '시간 압축 효과(time-compression effect)'라고 한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심리학과 교수 로버트 오른스타인(Robert Ornstein, 1942 ~ )은 16세기 풍속화가인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 ~ 1569)의 동판화 〈연금술사〉를 실험 참가자들에게 15초 동안 보여준 뒤, 다시 15초 동안 단조로운 사각형 그림을 보게 하는 실험을 했다. 참가자들에게 각각의 그림을 얼마나 본 것 같으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미지 정보의 양이 많은 브뤼헐의 그림을 더 오랫동안 본 것 같다고 응답한 사람이 많았다. 이 실험의 의미에 대해 이남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흔히 나이가 들면 하루하루 비슷한 일상으로 보내는 것이 지겹다고 말하는 동시에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한다.……기억 속에서 가져올 만한 정보가 적기 때문이다. 만약 나이가 들어도 계속 색다른 경험을 하고 집중해서 처리할 일을 많이 한다면 다르게 말할 것이다. 혹은 메모나 사진 등으로 현재에 벌어지는 일들을 정리해 나중에 기억으로 떠올릴 만한 것을 많이 갖게 된다면, 지나간 시간을 되살리기 쉽기 때문에 시간이 덧없이 빨리 지나간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을 것이다."

드라이스마는 좀 다른 관점에서 시간 압축 효과가 일어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망원경 효과(telescoping effect)'다. '망원경 편향(telescoping bias)'이라고도 한다. 망원경으로 물체를 볼 때 실제 물체와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게 느끼는 것처럼,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겪은 일들을 실제보다 최근의 일로 기억한다. 현재와 가까운 일처럼 인식하는 효과로 인해 시간적인 거리가 축소되고, 따라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회상 효과'다. 사람들은 기억 속의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알아내려 할 때 발생 시기가 잘 알려져 있는 사건들을 표식으로 이용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즐겨 쓰는 "내가 처음으로 무슨 일을 했을 때"라는 표현이 그걸 잘 말해준다. 그런데 나이 들수록 이런 표식이 줄어든다. 표식이 줄면 기억도 줄고 그만큼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질 것이다

셋째, '생리시계 효과'다. 나이가 들수록 도파민 분비가 줄어 중뇌에 자리한 인체시계가 느려진다. 미국 신경학자 피터 맹건(Peter Mangan)은 실험을 통해 나이에 따라 시간에 대한 감지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알아냈다. 9~24세, 45~50세, 60~70세 연령대별로 3분을 마음속으로 헤아리게 했더니 재미있는 결과가 나타났다.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은 3분을 3초 이내에서 정확히 알아맞혔지만 중년층은 3분16초, 60세 이상은 3분40초를 3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생리시계가 느려지니 실제 시간은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리라.

유정식은 『착각하는 CEO』에서 시간 압축 효과의 의미를 기업 경영에 접목시켰다. 그는 "잘나가던 노키아는 왜 뒤처졌나?"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인간으로 구성된 기업이 경험하는 환경의 변화 속도 역시 그러하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노쇠한 기업이 환경의 변화 속도에 대응하려고 나름의 전략을 세운 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실행에 옮기려고 할 때면 이미 그 정도의 변화는 경과한 지 오래이기 십상이다."

나이 들수록 시간은 빨리 흐른다고 하지만, 나라에 따라 차이는 있다. 한국처럼 초고속 압축 성장을 이룬 나라에선 '속도 경쟁'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치열하기 때문에 노인이 되는 속도도 빨라 시간의 속도 감각을 더욱 빠르게 만든다. 경로(敬老) 사상이 제법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대가는 가혹하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조로(早老)를 강요한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한국처럼 '젊은 기자', '젊은 앵커'가 판치는 나라는 없다.

외국인들은 늘 그 점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캐나다인으로 장안대학교 영어과 교수인 매튜 클레먼트는 「너무 일찍 늙는 한국인」이라는 칼럼에서 "연예인들 얘기를 할 때면 '벌써 30대, 혹은 40대……'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40대의 여가수가 섹시 의상을 입고 나서면 그야말로 '사건'이 된다. 그 가수 나이가 몇인데……라는 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한국인들은 남보다 더 일찍 늙는 걸까"라고 묻는다.

"로비의 안내데스크 등에서 나이가 많은 여성, 혹은 남성이 앉아있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이런 일이야말로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뉴스를 전달하는 아나운서나 승무원도 나이와 상관없는 일인 것 같다. '이 나이에 이런 옷을 어떻게 입어'라든가, '그런 짓을 어떻게 해, 내 나이가 몇인데……'라는 말을 들으면서 답답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스포츠카를 몰아도 되는 나이, 짧은 스커트를 입을 수 있는 나이, B-boy 댄스를 배울 수 있는 나이……. 나는 궁금하다. 도대체 누가, 왜, 나이에 대한 특별한 선입견을 만들어서 그 모든 것을 막고 제한하는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한국처럼 노인을 공경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박대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노인 문제는 사실상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가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을 나이 많다고 차별하는가? 권력 없고 돈 없는 노인만 서러울 뿐이다. 노인이 박대 받는 세상에선 노인의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게 꼭 ** 것만은 아니겠지만, 사회적으로 노인 박대는 자해(自害)다. 한국은 이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13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613만 7,702명으로 전체 인구의 12.2퍼센트를 차지했으며, 2025년 1,000만 명을 넘어선 뒤 2050년 1,799만 1,052명을 기록, 전체 인구의 37.4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고령화 속도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편에 속해, 노인의 노동력을 활용하고 그들의 사회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디자인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흔들릴 정도다.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건 '시간 압축 효과' 때문이라지만, 국민적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가 이룩한 세계 초유의 압축 성장이 비슷한 효과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세상을 너무 빠른 속도로 살아온 탓에 안전을 돌볼 겨를도 없었고, 그래서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적 사태를 맞이하게 된 건 아닐까? 뒤늦게나마 여기저기서 '느리게 살기'의 장점을 예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간 누려온 물질주의적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하겠다는 각오조차 없이 느리게 살겠다는 건 심리적 수명을 연장하려는 또 다른 탐욕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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