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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디' 태국에 한국혼(魂) 심고 있는 태국 국가대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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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디태국에 한국혼() 심고 있는 태국 국가대표 감독 최영석

 

운명은 예정된 것일까?

 

그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할 지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 같은 인연으로 비롯된 그의 삶은 가난 탓에 더 탄탄하고 예리해 졌다.  곤궁함이 있어 집중할 수 있었고, 희망의 끈도 더 거세게 움켜 쥐었다.

 

 

최영석1

 

 

무에타이의 나라 태국의 국가대표 태권도 감독 최영석(37).

 

태국 생활 만 9년 째인 그는 태국 유명인사다.

 

`타이거 최’라고 불리기도 하는 최영석은 2년에 한번 꼴로 태국을 들었나 놨다 한다. 세계 150위권이던 태국 태권도를 4위로 점프시켰다. 2002년 월드컵의 히딩크를 떠올리면 딱 맞겠다.

 

그는 태국 왕실의 훈장을 받고,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스포츠 대상을 2번씩이나 받았다. 그의 발걸음은 늘 기대치를 추월한다. 최영석 감독은 지난달 한국 경주에서 열린 세계 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또 2개의 금메달을 수확했다.

 

태국이 세계 태권도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이번이 처음. 광조우 아시안게임의 금메달 흥분이 가실까 말까한 시점에서 또 놀라운 일을 벌인 것이다. 태국 태권도의 신천지를 개척해 가는 그를 만났다.

 

-한국에서 또 일냈다.

 

@부담이 컸다.  긴장도 되고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지도자는 부담을 갖고 사는 게 아닌가. 기대 이상이다.

 

 

-지난해 광조우 아시안게임 흥분이 생생하다. 당시 태국은 태권도에서 처음으로 기다리던 금메달이 나왔다. 19세 소녀 사라타라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 정말 난리가 났다. 중국 현지에서도 알고 있었나?

 

@현장에서는 물론 돌아와서도 신문, 방송에 출연하느라 정신 없었다. 금메달 2개로 태권도로만 본다면 광조우에서 중국, 한국, 이란에 이어 태국이 4위였다. 이번 경주에선 한국에 이어 공동 2위를 차지한 셈이 됐다.

 

 

-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태국 대표팀의 한국코치가 개인사정으로 귀국하게 돼 8개월간 계약직 코치를 맡게 됐다. 당시 바레인에서 코치로 있었는데, 막 계약이 끝날 때 쯤이었다.  태국으로 오게 된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대타였던 셈이다.  `죽도록 가르쳐 보자’는 생각 밖엔 한 것이 없다.

 

단내 나도록 시키는 훈련, 기대치를 앞서가는 성적

 

-그 뒤부터 승승장구다.

 

@2년 뒤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여자 -49kg에서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에 출전한 것도 처음이지만 메달을 딴 것은 전례 없던 일이었다.   4년 뒤인 베이징 올림픽에선 역시 여자 -49kg에서 은메달을 땄다.

 

 

-국제대회에서 늘 기대를 앞서 나간다.  비결이 있나?

 

@훈련량을 늘리고, 같은 훈련도 집중해서 하는 것이다. 선수들은 훈련한 게 억울해서 맨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하루에 훈련을 얼마나 시킨단 말인가?

 

@수업시간을 피해 아침 저녁으로 한다. 보통 오전 6시부터 2시간, 오후 5시부터 3시간 동안 하루 5시간의 훈련을 기본으로 한다.  일요일만 빼곤 매일 한다.

 

 

-단내 나겠다.

 

@경기를 앞두고는 선수들과 장난치고 웃기기도 한다.  하지만 훈련 때는 물 한 모금, 화장실 가는 것 조차 다 허락을 받도록 한다.  새벽 운동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돌려보낸다. 훈련 때 엄하게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분위기가 형성되고 체계가 쌓였다. 운동은 못해도 약속을 지키고 인성을 닦으라는 말을 한다. 국제대회에 나갔을 때 다른 팀으로부터 태국선수들이 착하고 인사성도 바르다는 칭찬을 많이 받는다.

 

 

-대표선수 선발에 전권을 쥐고 있다고 들었다.

 

@2006년 이후부터다.  새로운 대표팀을 선발해 기존선수와 경합해 선발하는 방식이다.

 

 

-화려한 수상경력이 있는데, 한 해에 딱 하나씩만 소개해 달라.

 

@2004년 왕실훈장을 받았고, 2005년 태국 외무부 장관이 주는 공로상, 2006년엔 총리상, 2007년엔 체육기자들이 선정한 최우수 지도자상, 2008년엔 씨암낄라 스포츠대상 및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2009년엔 태국 체육회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았다. 2010년인 지난해는 씨암낄라 스포츠대상을 또 받았는데, 이 상을 받은 외국인도 없지만, 2번 받은 사람은 더더욱 없어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던 야오와파라는 여자선수다. 집안이 가난했다. 태권도를 하기엔 신체조건도 안 좋았고, 운동신경도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단한 투지의 소유자였다. 나와 직접 대련해서 입술이 깨지고, 치아가 흔들린 적도 있었는데,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다시 덤벼들었다.  이 친구 때문에 태국에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됐으니, 오히려 나의 은인이다. 어렵게 자란 과정도 나와 비슷했다. 2008년 족막염으로 은퇴하고 지금은 국영방송 TV의 스포츠 해설가로 변신했다.

 

 

-태국 국립대학의 전임교수직도 추대 받았다고 들었는데.

 

@올해부터 카세삿대학 스포츠 과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3월부터 일주일에 두번씩 강의한다. 강의당 수강생은 40명쯤 된다. 스포츠과학부 안에 무도학과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사실 메인은 태권도다.

 

 

임춘애 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대타로 나가 홈런 치다.

 

-태권도와의 인연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유단자 친구를 따라 도장에 갔다가 태권도를 하게 됐다. 3~4개월 훈련했을 무렵에 전국대회가 있었는데 한 명이 빠져 대타로 출전하게 돼 동메달을 땄다.  태국 국가대표 감독도 `대타 코치’에서 시작했듯, 태권도 입문도 대타로 나가 홈런을 친 셈이었다.

 

-어린 시절은?

 

@집안이 어려웠다. 아버지가 7세 때 돌아가셨다.  위로 누나가 한 분 있고 어머니는 낮에는 공장일, 저녁엔 파출부 일을 하시면서 남매를 키웠다. 그것도 친구 집에서 파출부를 하셨는데,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이다.  86아시안 게임의 육상스타 임춘애씨가 초등학교 3년 선배다. 신문에 라면 먹고 뛰었다고 나왔는데, 우리 집은 훨씬 더 가난했다. 어머니의 꿈은 아들이 교수가 되는 것을 보는 거였다. 태국에 오기 직전인 2002년 돌아가셨다. 이제 교수가 됐는데 안 계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태국에 오면서 더욱 지독히 선수들을 가리 친 계기가 됐다.

 

 

-태권도 선수로서는 어땠나?

 

@전국대회 1등은 해봤지만 국가대표는 못해봤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어렵다.

 

 

-태국에서 영어로 박사학위를 밟고 있으며, 태국어로도 인터뷰를 잘 하던데.

 

@외국에서 지도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돈을 더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돈이 없어 학원문턱은 못 가봤지만 영어공부는 열심히 했다. 태국어는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선수들과 운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 같다.

 

 

-태국생활은 어떤가?

 

@학교, 훈련장을 오가는 날의 연속이다. 아내를 위해 가끔씩 파타야 휴양지를 갔다 오곤 하는데, 가서 모자란 잠을 자는 것 뿐이다.(웃음)

 

 

-태국에서 또 다른 꿈이 있는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첫째 목표다. 경기 외적인 면에서는 태권도가 태국에 뿌리내려 보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겠지만, 그 작은 디딤돌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국에서 엄청난 대우를 해준다고 들었다. 아파트도 사줬다고 하던데.

 

@외국 지도자로는 최고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파트는 내 돈 주고 산 것인데..

 

 

-태국 외 다른 나라에서 엄청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 태국 언론에 보도되는데.

 

@다른 나라에서 몇 배의 연봉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늘 태국에 감사하며 산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해였는데, 그 해부터 이후까지 태국에서 많은 것을 이뤘다. 태국 사람들은  외국인이라고 차별 두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 줬으며, 과분한 사랑을 주었다.  10년 가까이 가리킨 제자들을 상대로 타국에서 경쟁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우선 부담이 되고, 태국인들을 대했던 그 불꽃 같은 열정을 가지지 못할 것이 두렵다.

 

 

길가 식당에서 쏨땀과 밥 한 공기, 닭다리 몇 개를 시켰지만 둘 다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태국에서 겪고 있는 그의 인생역전을 말하고 들을 시간이 꿈결처럼 흘러만 갔다. 성적과 결과로만 말해주는 스포츠. 최영석은 땀과 노력만 믿는 사람이었다. 선수는 물론 자신에 대해서도 혹독할 정도로 몰아 부치는 삶.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그 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담금질하고 있었다.

이국 땅 태국에서 그가 쌓아 올린 화려한 프로필의 이면엔 같은 부피, 같은 무게 만큼의 고통과 번민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기의 한국인 만이 견뎌내고 가능한 일이다. 최영석은 만만찮은 한국의 근성과 혼을 `만만디’ 태국에 심고 있었다.  태권도는 사실 그 다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이유현(Harry) -태 교류센터(KTCC) 대표이사>

 

최영석1.jpg (39.1Kb) (0)
작성자: 한-태교류센터(KTCC) , 작성일 : , 수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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