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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는 나무"[라텍스에 대하여]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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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무(라텍스)가 걸어온 길

 

지구상의 모든 물질은 인간에 의해 꾸준히 개발되고 발전하고 있는 반면, 인간의 탐욕에 의해 고갈되고 훼손되어가고 있다.

작용 반작용의 기본적인 자연법칙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삶 또한 그러한 것 같다.

특히 고무에 얽힌 과거를 정리하면 더욱더 그러하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천연 고무나무에서 추출된 라텍스를 이탈리아의 탐험가 콜롬버스(1451-1506)가 신대륙에 도착하기 훨씬 전인 BC 1800년 전부터 그릇, 신발, , , 장난감 등에 마야인과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페루의 원주민들은 고무나무를 카우추크(Cachuchu)이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를 눈물을 흘리는 나무이다.

소위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전형이 바로 고무나무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스페인의 역사학자 안토니오 드 에레라 토드에실라스는 <넓은 아메리카 대륙과 섬의 역사>에서 멕시코 이즈텍 인디언들이 공을 가지고 오늘날의 농구와 비슷한 놀이를 했다고 기록했다.

1500년대에 신대륙으로 건너온 스페인의 군사들은 고무를 이용해 물이 스며들지 않는 비옷을 고안해 사용했고, 고무신발, 고무외투, 심지어 고무 장난감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건너갔다. 아직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고무(라텍스)는 희안한 또는 진귀한 물건이라고만 여겨졌을 뿐 고온에 녹아 내리고 저온에 갈라져 부서지는 특성의 천연 고무를 이용할 수 없었다.

 

300여년이 지나 영국의 과학자 조셉 프리스틀리(1733-1804 자연철학자,화학자,신학자,교육자 ; 집광랜즈로 산소를 발견)가 고무 덩어리를 빵조각으로 오인하여 문질렀더니 깨끗하게 지워지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문지르다라는 의미의 “Rubber”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붙게 되었다.

영국 최초의 고무 공장은 1820년 런던의 사업가 토마스 행콕이 남아메리카에서 장갑과 장화의 원료가 되었던 고무 덩어리를 수입하여 방수 비옷을 만들었과,

1823년 스코틀랜드 태생의 찰스 매킨토시는 방수 비옷 제조 특허를 얻었다. 그는 천 사이에 고무를 끼워 넣어 이중 방수 옷감리라고 붙였는데 사람들은 발명가의 이름을 따서 매킨토시라고 불렀다.

미국에서 최초로 고무 사업을 한 회사는 1833년 보스턴 매사추세츠의 록스베리에 세워진 록스베리 인디아 고무 공장이었다. 이 회사는 신발과 외투, 모자, 구명 도구 등을 만들었다.

 

이후 1839년 찰스 굿이어(고무의 아버지)에 의해 가황법이 발명되면서 고무는 본격적인 변모를 시작하게 된다.

가황을 통해 고온과 저온에서 특유의 탄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고무는 그 쓰임새가 매우 다양하게 발전되어 상업과 공업의 무수히 많은 분야에 기여한다.

정작 굿이어는 특허 시비로 인하여 위대한 발명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운명했지만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 경제 구조의 변혁인 산업혁명뿐 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부분에서 크고 작은 영향들을 주고 있다.

 

찰스 굿이어의 가황법을 이용해 고무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고,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게 된 20세기 초 던롭이 개발한 자동차 공기 타이어로 인해 고무의 수효가 급격히 늘어났다.

당시 서구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를 넓혀가는 시기였다.

야생 천연고무에 대한 수요에 따른 공급 문제는 식민지의 원주민들에 무수한 고통과 상처를 남겨 주었다.

하루에 1 50그루나 되는 나무를 상대해야만 정해진 양을 채울 수 있었던 원주민들은 매일 30Km를 돌아다녀야 했고, 어떤 지역에서는 11년 동안 4천톤의 고무 채집을 위해 3만명에 이르는 원주민들이 살상되었다고 한다.

 

희생의 극치는 벨기에의 레오폴2세 왕의 집권 당시라 할 수 있는데 아프리카의 콩고 민중들에게 상아와 고무에 대하여 일정한 할당량을 정하고, 이를 채우지 못할 경우 참수하거나 손, 발을 절단하여 형벌을 가하는 대 학살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콩고 테러라고 하는 이 사건에 무려 1000만 명 이상이 학살(최대 3000만 명까지 보는 학자도 있음) 당하였다고 하니 그 엄청난 숫자 앞에 도저히 듣고도 믿기지 않는 너무나도 처참한 인류 역사의 한 단면이라 하겠다.

소위 고무나무의 수액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고 카우추크(눈물을 흘리는 나무)”이라 이름 지었던 페루의 말이 역사 속에서 현실화 되었다고나 할까?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를 통해서 고무를 수급 했으나 공급이 한계에 이르자 고무나무 묘목을 중앙 아메리카(브라질)에서 가져와 동남아시아(스리랑카,싱가폴,말레이지아) 등 기후 조건이 비슷한 지역에 대규모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산업사회에 들어선 가운데 계속적으로 소모되는 천연고무의 수요는 갈수록 부족해졌다.

 

1, 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천연 고무는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전쟁물자 즉 군수산업의 폭발적 수요에 힘입어 최초 독일에서 1차 세계대전 중 합성 라텍스(합성고무)를 만들게 되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미국 또한 온 힘을 기울여 2차 세계대전 중 합성 고무의 양산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즉 기술의 발전과 전쟁으로 인한 동남아에서의 고무 원료 수급이 어려워지자 합성 라텍스의 개발이 가속화 되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 고무제품이 들어온 연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1881년 조선 말 민영익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연필용 지우개와 고무공을 선물로 받아왔다고 하며, 1883년 우정국 시설이 가설될 때 고무부품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경인선이 완성된 1899년 기차용 고무부품이 들어왔을 것이고, 고종의 전용 자동차가 들어왔을 때도 고무타이어가 끼워져 있었을 것이다.

 

신발이라 한다면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이 개발해 낸 오래된 문화유산의 하나일 것이다.

기원전 4000년경 이집트 사람들이 사막을 걷기 위해 동물의 가죽을 발에 감쌌던 것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의 집신, 가죽신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의 변천을 겪었다.

 

그 중 우리나라 최초의 고무 제품의 생산 및 보편화는 고무신이라 할 수 있다.

1919년 이하영이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처음 창설하였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에게 진상하였기에 고무신을 처음 신은 우리나라 사람은 바로 순종이라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김성수의 중앙상공주식회사, 김동원의 정창고무공장(평양), 원산의 조선고무공업사, 한성고무, 반도고무, 경기고무, 태창고무, 시선고무, 동아고무 등이 설립되었다.

1937년에는 전국에 고무공장 수가 86, 종업원수 8,157, 생산된 신발은 3118 9471족에 이르렀다 한다. 일본인들의 고무제품 생산활동에 비해 한국인의 활동은 매우 미약하였으며, 2차 세계대전 중의 엄격한 통제경제 하에서 원료의 궁핍 등 극심한 위축을 면치 못하였다.

 

8.15 광복을 계기로 점차 활기를 띠게 될 무렵 한국전쟁의 발발로 침체상태로 들어갔다가, 1960년도 하반기부터 기술적, 경제적인 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1973년 합성고무인 SBR(Styrene Butadiene Rubber) BR(Butadiene Rubber), 1983 NBR(Nitrile Butadiene Rubber), 1987 EPR(EPDM, Ethylene Propylene Rubber)을 각각 생산 개시하여 합성고무 생산국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천연고무를 100% 수입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는 주로 말레이시아산을 수입하였으나, 말레이시아의 생산 감소로 인하여 수입국가를 다변화 하였고, 1997년에는 태국산 38%, 인도네시아산 30%, 말레이시아산 30% 수입 되었다.

 

태국 고무의 시작은 서구열강의 식민지 확장정책이 진행되는 가운데 1899-1901 사이로 추정된다.

말레이시아와 인접한 태국 남부 뜨랑의 라싸다누쁘라딧 마히썬팍디태국 고무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고무나무 묘목 4그루를 몰래 숨겨와서 뜨랑주 깐땅면에 옮겨 심었으며, 이후 뜨랑과 나라티왓까지 확장해 심었다 한다.

공식적으로는 1911루엉라차마이뜨리가 짠타부리 지역에 고무 종자를 가져와 재배한 후 남부지역 14개주와 동부지역 3개주에 수목하였고, 점차 중부지역과 동북부지역까지 확장시킨 것으로 되어있다.

태국은 서구열강 중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직접 식민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일본의 편을 들어 주었으며, 서구열강과 일본이라는 두 번의 위기를 “Banding with the wind” 또는 이중외교 정책이라는 형식을 빌어 넘기게 된다.

또한, 근대사를 지나는 과정에서 입헌 군주제가 정착되었기는 하나 왕족,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대지주들을 중심으로 넓은 땅에 고무를 심게 되었으며, 1991년 이후부터는 세계 천연고무수출 1위를 달성하여 말레이시아를 넘어섰고, 2000년에는 년 생산량 240만 톤에 이르는 고무생산 1위국이 되었다.

 

3부에 계속 

작성자: 작은소리 , 작성일 : , 수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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