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지전적 인물인 그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가시밭길’에 있었다. 80년대말 야당인 통일민주당 간판을 달고 부산에 출마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인 허삼수 민정당 의원을 누르면서 정치권에 입문한 노 전 대통령은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 장세동 씨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청문회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후 잇따른 낙선으로 야인생활을 해야했다. 1992년 ‘꼬마 민주당’ 후보로 부산에 출마했다 낙선하고,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서 36.7%의 높은 득표율을 올리고도 2위에 그쳤다.
98년엔 종로구 보궐선거에 당선되고도 2004년에 지역주의 타파를 기치로 종로를 떠나 부산에 재도전했으나 다시 패했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이라는 기득권, 안락한 지역구를 떠나 대의를 좇는 그의 모습에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이 붙었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조직됐다.
열성적인 지지층을 바탕으로 ‘노풍(盧風)’을 일으킨 그는 2002년 당시 ‘대세’였던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이어 유력 정치인인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까지 제치고 비주류 정치인으로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정치역정과 삶 자체가 증명하는 ‘깨끗함’이 당선의 원동력이었다. 소액기부를 유도하기 위해 나눠 준 ‘희망돼지 저금통’은 노 전 대통령 정치의 상징으로 인식되면서 화제가 됐다. 과거 정치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한나라당과 이회창후보를 과거-부패세력으로 규정하고 권위주의를 타파해나갔다.
취임 이후 국정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을 때에도 도덕성은 강력한 방패막이가 됐다. 취임 첫해인 2003년에만 “부정부패를 없애야 한다. 사회지도층의 뼈를 깎는 성찰을 요망한다”(취임사) “청탁이나 청탁의 대가를 수수한 일도 없었고, 부정한 정치자금의 거래 등 어떤 범법행위도 없었다”(생수회사 장수천의 위장 매각 논란 당시)고 수 차례 강조했다.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1이 넘으면 재신임을 받겠다”고 했다가 ‘10분의1’이 넘은 것으로 드러나고도 정치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노무현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퇴임 이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의 불법 자금수수 혐의로 노 전대통령은 물론 권양숙 여사, 아들 등 전 가족이 검찰 소환을 받으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줌은 물론 노 전 대통령이 큰 심적 고통을 받아왔다.
그의 충격적인 사망으로 수구 기득권 세력과 맞서 한국 사회를 바꾸어 놓으려던 그의 야심찬 도전은 꿈으로만 남게 됐다. 번듯한 배경 없이도 정도(正道)를 걸으면서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코리안 드림’도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됐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맏형, 구시대의 막내가 되겠다”고 했던 노 전 대통령은 결국 새 시대의 문을 열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면서 국민들에게 또다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김하나 기자/[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