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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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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태국 사람들은 약 2,500년 전 중국의 남부지역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타이"라는 국명은 "자유"를 의미하는 태국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20세기 외세의 지배를 한번도 받은 적이 없는 나라가 태국이다. 물론 이는 국민의 애국심과 뛰어난 외교술에 기인한다. 왕을 국가의 수반으로 하는 입헌 군주제 국가이다. 태국인들 정착전의 태국역사는 아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역사가들은 몬족(버마人)들이 이 지역을 물려 받아서 거주해 태국이 처음으로 우통에 수도를 둔 수바나부미 몬 왕국에 의해 통치를 받았었다고 믿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고고학자들은  반치앙의 북동쪽 작은 마을 근처에서 약 5천6백년 전의 것으로 추측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후 몬족, 크메르족, 타이족을 비롯한 많은 종족들의 이민 행렬이 이어지게 되었고 지금의 태국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땅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중국  남쪽으로부터 기름진 땅과 강 , 계곡을 따라 천천히 이동해온 무리들이었다. 약 11,12세기 경에는 크메르족이 앙코르로부터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기도 했다.

 

난황제가 3세기후 지배해 나콘파톰이 수도였다. 675년 드라바티가 크메르황제하에 총독의 임기를행사했다(11세기). 차오프라야 유역의 수로를 이용할 수 있는 농업의 가능성에 매료되 쌀을 경작했던 태국인들은 11세기에 중국 남쪽에서 이주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초, 타이족은 북쪽의 란나, 파야오, 수코타이에 조그만 공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238년에 이르러서는 2명의 타이 지도자들이 크메르 영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최초의 독립왕국인 수코타이(행복의 새벽이라는 의미)를 세웠다.

 

향후 차오프라야강 유역을 따라 발전하게 되는 타이 왕국의 기초가 되었다.태국의 국교인 테라바다불교(Tehravada Buddhism)를 확립하고 , 태국 문자의 발명 , 미술 , 조각 , 건축과 문학 등 태국 예술 형성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수코타이 왕국은 치앙마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1238년에 드라바티를 압도해 크메르를 병합해 통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00년경에 쇠퇴일로를 걸으면서 결국에는 신흥 아유타야 (Ayutthaya) 왕국의 종속국이 된다.

 

14세기에 는 수코타이와 다른 그 밖의 작은 왕국들을 차례로 병합해 부와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1350년에 건립된 이 아유타야 왕국은 챠오프라야 강 남부 멀리까지 영토하에 두었다. 1767년 버어마의 침략을 받기까지 태국 중심지의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사절단(시암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 1511년 도착했으나 동남아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태국은 결코 유럽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417년간 33명의 왕이 통치한 아유타야 왕국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켰다. 전체적으로는 크메르의 영향에서 벗어나 아라비아, 인도, 중국, 일본 및 유럽과도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 아유타야의 붕괴는 프랑스의 파리나 영국 런던의 붕괴와 비견할만큼 엄청난 것이었다.그러나 후에 탁신왕이 버어마를 몰아내고 수개월만에 타이왕국을 재건하였다.

부르만들은 1767년 아유타야의 수도를 함락시켜 새로운 지역, 즉 현재의 방콕으로부터 차오프라야를 건넌 톤부리에 새 수도를 설립했다. 1782년에 이르러 차크리왕조의 초대 왕인 라마 1세가 차오프라야 강 유역의 방콕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현재의 왕궁은 이 기간에 2번째 왕이었던 챠크리 장군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19세기에 완벽한 군주제 통치를 했던 몽굿(라마4세:1851~68년)왕이 태국을 근대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 쥴라롱콘(라마5세:1868~1910)왕이 노예제도 폐지와 철도창시 전보서비스 과학교육 등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러한 서구방식의 표출은 1932년 입법부가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가의 완벽한 군주대치를 요구하는 태국 지식인들의 무혈폭동을 야기시켰다. 혁명은 또한 군대와 오늘의 태국정치가 계속될 수 있도록 정부를 제제하는 시민단체 사이에 분쟁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일본의 통치가 끝난 후 1945년과 1946년 사이에 쎄니 프라모지하의 시민정부가 국가를 다스렸다. 1947년에 무혈군대반란이 마샬 피불 쏭크람 전투를, 1957년 이와 유사한 폭동이 마샬 싸릿타나랏 전투를 일으켰다. 싸릿은 1963년에 죽고 그의 후계자인 타놈 키티카촌(최후의 마샬 전투) 장군이 1968년에 적은 기간 동안 정치적인 시민통치를 주도했으나 1971년 쌓여있던 불안 때문에 군사통치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1973년 싸냐 다르마삭티가 임시 시민정부를 창설했다.1975년에 치뤄진 선거는 다수당 창당에 실패해 쎄니프라모지와 쿡크릿 파라 모지가 각각 연합정부를 만들었으나 분단된 국가를 통일하는 데는 실패했다. 쎄니는 1976년 공직에 재선됐으나 나중에 그해 쌍가드 차롤유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반란으로 쫓겨났다. 타닌크라이비치엔이 수상이 되었으나 1977년에 크리앙삭 초마난 장군 지휘하의 무혈반란으로 대치되었다. 1979년 선거는 크리앙삭을 선거로 선출된 정부의 수상으로 공직에 재임시켰으나 1980년에 사임했다.

현재의 태국은 입헌 군주제로 1932년 이래 현재의 국왕인 푸미폰 압둘야뎃 ( H.M. King 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에 이르기까지 태국의 국왕들은 국회를 통하여 입법권을 ,수상이 이끄는 내각을 통하여 행정권을, 사법부를 통한 사법권을 행사해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실상의 국가 통치자는 국왕이다. 태국은 한국과 오랜 우방 관계를 지속해 온 국가로 1949년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 한국 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1972년까지 한국에 주둔하기도 했다.
1959년에 정식으로 양국간 외교 관계가 성립되었고 1981년 양국간 사증면제협정 체결로 한국인은 비자없이 90일간 태국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작성자: BKKMAN , 작성일 : , 수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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